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에 심각한 감기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가 된 적이 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잃을 정도로 끙끙거릴 때, 옷을 벗기고 찬물에 적신 수건을 짜내어 어머니가 몸에 덮어 주셨습니다. 찬 수건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을 뺏으며 몸에 열이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왠지 모르게 코로나로 고생하는 며칠 동안 그때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이 세상에 안 계시고, 나는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이 되었는데…. 그때처럼 아프지도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코로나에 걸리고 다시 음성으로 회복되어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식도락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먹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하던지요! 잠시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제 몸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는데, 후각과 미각이 이리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음식의 향이 느껴지지 않으니 미각은 오로지 혀의 자극과 식감으로 느껴야 하는 끔찍한 며칠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 풍미를 다시 회복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몇 가지 보충제를 구매했습니다. 나름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하며 코로나 후유증을 줄이는데 도움을 주는 영양제를 찾아서 아내가 관리하는 아마존 어카운트를 통해 구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녔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아내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사주지 못했는데, 내가 아프니 여기저기 찾아서 건강의 손실을 줄이고 회복하려는 제 모습을 발견한 것이지요. 아파보아야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듯이 내 몸에 민감해지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이타적으로 발돋움해야 하는 모자란 사람인지도 이 성탄의 절기에 알게 됩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 맞이하는 성탄절입니다. 교회력의 절기에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인데, 라디오와 길거리에서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캐럴이 넘쳐납니다. 연말이 되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갖가지 기획상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문화입니다. 마음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화폐를 주고 선물을 살 때, 선물은 그 화폐의 값어치만 한 교환가치를 지니게 되지요. 그런데 선물을 받으면 또 선물로 갚아야 하는 심리적 교환가치를 품게 됩니다. 그러니 1년 중 자본주의의 교환가치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때가 바로 예수님 태어나신 성탄절 시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탄절이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교환가치”가 아닌 “희생의 가치”입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성육신”의 사건도 신의 자기희생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도 바로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희생의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잃어버린 희생의 가치를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해 회복하는 날입니다.
때론 예수님마저 내 성공과 축복을 위해 사용하는 교환의 가치로 삼고 있는 기독교의 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자기 부정”이 더 간절하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히틀러를 암살해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맞이하려 했던 젊은 신학자 본 회퍼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의 문장을 인용하며 성탄절에 대한 짧은 생각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예수와의 만남에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인간이 죽든지, 아니면 예수를 죽이든지….”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에 심각한 감기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가 된 적이 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잃을 정도로 끙끙거릴 때, 옷을 벗기고 찬물에 적신 수건을 짜내어 어머니가 몸에 덮어 주셨습니다. 찬 수건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을 뺏으며 몸에 열이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왠지 모르게 코로나로 고생하는 며칠 동안 그때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이 세상에 안 계시고, 나는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이 되었는데…. 그때처럼 아프지도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코로나에 걸리고 다시 음성으로 회복되어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식도락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먹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하던지요! 잠시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제 몸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는데, 후각과 미각이 이리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음식의 향이 느껴지지 않으니 미각은 오로지 혀의 자극과 식감으로 느껴야 하는 끔찍한 며칠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 풍미를 다시 회복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몇 가지 보충제를 구매했습니다. 나름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하며 코로나 후유증을 줄이는데 도움을 주는 영양제를 찾아서 아내가 관리하는 아마존 어카운트를 통해 구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녔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아내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사주지 못했는데, 내가 아프니 여기저기 찾아서 건강의 손실을 줄이고 회복하려는 제 모습을 발견한 것이지요. 아파보아야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듯이 내 몸에 민감해지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이타적으로 발돋움해야 하는 모자란 사람인지도 이 성탄의 절기에 알게 됩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 맞이하는 성탄절입니다. 교회력의 절기에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인데, 라디오와 길거리에서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캐럴이 넘쳐납니다. 연말이 되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갖가지 기획상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문화입니다. 마음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화폐를 주고 선물을 살 때, 선물은 그 화폐의 값어치만 한 교환가치를 지니게 되지요. 그런데 선물을 받으면 또 선물로 갚아야 하는 심리적 교환가치를 품게 됩니다. 그러니 1년 중 자본주의의 교환가치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때가 바로 예수님 태어나신 성탄절 시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탄절이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교환가치”가 아닌 “희생의 가치”입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성육신”의 사건도 신의 자기희생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도 바로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희생의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잃어버린 희생의 가치를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해 회복하는 날입니다.
때론 예수님마저 내 성공과 축복을 위해 사용하는 교환의 가치로 삼고 있는 기독교의 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자기 부정”이 더 간절하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히틀러를 암살해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맞이하려 했던 젊은 신학자 본 회퍼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의 문장을 인용하며 성탄절에 대한 짧은 생각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예수와의 만남에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인간이 죽든지, 아니면 예수를 죽이든지….”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