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유튜브로 음악을 듣던 중, 제가 좋아하는 악동뮤지션의 이찬혁 군의 신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장례 희망〉이었는데, 무심코 보던 중에 미래를 뜻하는 ‘장래’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로도 번역된 제목은 〈Funeral hope〉이었는데, 찬혁 군이 “자신의 장례식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만든 곳이었습니다. 가사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아는 얼굴 다 모였네 여기에
한 공간에 다 있는 게 신기해
모르는 사람이 계속 우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 미안해
종종 상상했던 내 장례식엔
축하와 환호성 또 박수갈채가
있는 파티가 됐으면 했네
왜냐면 난 천국에 있기 때문에
오자마자 내 몸집에 서너 배
커다란 사자와 친구를 먹었네
땅 위에 단어들로는 표현 못 해
사진을 못 보내는 게 아쉽네
모두 여기서
다시 볼 거라는 확신이 있네
내 맘을 다 전하지 못한 게 아쉽네
젊은이다운 기발한 가사에 자신의 신앙적 고백이 매우 진실하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아직 3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는 저 마음은 신앙의 고백일까? 어려운 절망적 환경에 놓인 이유일까? 아니면 그만큼 성숙한 사고를 젊어서부터 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이지요. 그 나이의 저를 생각해보니 무서운 것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 죽음을 염두에 둘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문화비평가로 유명한 고 이어령 교수가 쓴 〈기저귀 문화〉란 신문의 칼럼을 기억합니다. 이어령 교수에 따르면 인간 의식 속에는 빛과 어둠, 높은 것과 낮은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건강과 질병…. 등등 이 두 개의 양극이 서로 섞이고 교환되면서 생성과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양극단의 가장 끝에 있는 것이 바로 삶과 죽음이라는 의식입니다. 삶과 죽음이란 극단을 대표하는 의식을 이어령 교수는 “기저귀”와 “수의”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기저귀가 삶의 문화라면 수의는 죽음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삶이 성숙해지기 위해선 기저귀와 수의가 다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균형감을 상실한 문화에 대해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지금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직 ‘기저귀’ 문화만이 있다. 죽음이라는 숙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마치 이 땅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한없이 높은 욕망의 바벨탑만 쌓아가고 있다. 마치 기저귀를 찬 아이처럼 오직 보채고 빨고 배설하기만 하는 욕망의 순환만이 있을 뿐이다.”
목회하며 어느 순간, 이 죽음을 준비하고 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생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도망가 죽음을 무의식 속으로 떠나보낼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컴컴한 어둠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죽음 앞에 자신의 유한함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의 지혜에 대해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운 마음을 지닌 사람은 바로 “자기가 살아갈 날을 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을 준비하는 예배 학교”나 “아버지 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많이 준비하고 가르치는데, 저는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와 같은 프로그램도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등록 교인이 되기 위해 실시하는 “섬김의리더십학교”의 1단계 〈구원세미나〉도 바로 이런 고민 끝에 진행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분명한 구원론이 죽음을 두려움의 경계가 아닌 영생의 소망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경계라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평소 가끔 연락하고 지내던, 교회를 개척한 후에도 몇 차례 찾아와 주셨던 권사님 한 분이 생각나 연락을 드리니 통화가 안 되었습니다. 평소 지병으로 몸이 약하셔서 걱정돼 며칠 동안 계속 연락을 드렸는데, 신호는 가도 통화가 안 됐습니다. 갑자기 불안해져서 백방으로 권사님의 주변 분들에게 연락을 드려도 모두가 연락이 안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절박하게 기도만 하던 중 며칠이 지나 “입원하고 오늘 퇴원해 연락을 드립니다. 나중에 몸이 회복되면 연락하겠습니다”라는 카톡 문자가 왔습니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제 나이가 들어가는 것보다 내 가족과 교우들이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세월의 엄위한 현실 앞에서 생각해 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의 가장 가치 있고 진실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 샬롬!
언젠가는 유튜브로 음악을 듣던 중, 제가 좋아하는 악동뮤지션의 이찬혁 군의 신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장례 희망〉이었는데, 무심코 보던 중에 미래를 뜻하는 ‘장래’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로도 번역된 제목은 〈Funeral hope〉이었는데, 찬혁 군이 “자신의 장례식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만든 곳이었습니다. 가사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아는 얼굴 다 모였네 여기에
한 공간에 다 있는 게 신기해
모르는 사람이 계속 우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 미안해
종종 상상했던 내 장례식엔
축하와 환호성 또 박수갈채가
있는 파티가 됐으면 했네
왜냐면 난 천국에 있기 때문에
오자마자 내 몸집에 서너 배
커다란 사자와 친구를 먹었네
땅 위에 단어들로는 표현 못 해
사진을 못 보내는 게 아쉽네
모두 여기서
다시 볼 거라는 확신이 있네
내 맘을 다 전하지 못한 게 아쉽네
젊은이다운 기발한 가사에 자신의 신앙적 고백이 매우 진실하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아직 3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는 저 마음은 신앙의 고백일까? 어려운 절망적 환경에 놓인 이유일까? 아니면 그만큼 성숙한 사고를 젊어서부터 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이지요. 그 나이의 저를 생각해보니 무서운 것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 죽음을 염두에 둘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문화비평가로 유명한 고 이어령 교수가 쓴 〈기저귀 문화〉란 신문의 칼럼을 기억합니다. 이어령 교수에 따르면 인간 의식 속에는 빛과 어둠, 높은 것과 낮은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건강과 질병…. 등등 이 두 개의 양극이 서로 섞이고 교환되면서 생성과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양극단의 가장 끝에 있는 것이 바로 삶과 죽음이라는 의식입니다. 삶과 죽음이란 극단을 대표하는 의식을 이어령 교수는 “기저귀”와 “수의”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기저귀가 삶의 문화라면 수의는 죽음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삶이 성숙해지기 위해선 기저귀와 수의가 다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균형감을 상실한 문화에 대해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지금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직 ‘기저귀’ 문화만이 있다. 죽음이라는 숙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마치 이 땅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한없이 높은 욕망의 바벨탑만 쌓아가고 있다. 마치 기저귀를 찬 아이처럼 오직 보채고 빨고 배설하기만 하는 욕망의 순환만이 있을 뿐이다.”
목회하며 어느 순간, 이 죽음을 준비하고 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생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도망가 죽음을 무의식 속으로 떠나보낼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컴컴한 어둠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죽음 앞에 자신의 유한함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의 지혜에 대해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운 마음을 지닌 사람은 바로 “자기가 살아갈 날을 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을 준비하는 예배 학교”나 “아버지 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많이 준비하고 가르치는데, 저는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와 같은 프로그램도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등록 교인이 되기 위해 실시하는 “섬김의리더십학교”의 1단계 〈구원세미나〉도 바로 이런 고민 끝에 진행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분명한 구원론이 죽음을 두려움의 경계가 아닌 영생의 소망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경계라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평소 가끔 연락하고 지내던, 교회를 개척한 후에도 몇 차례 찾아와 주셨던 권사님 한 분이 생각나 연락을 드리니 통화가 안 되었습니다. 평소 지병으로 몸이 약하셔서 걱정돼 며칠 동안 계속 연락을 드렸는데, 신호는 가도 통화가 안 됐습니다. 갑자기 불안해져서 백방으로 권사님의 주변 분들에게 연락을 드려도 모두가 연락이 안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절박하게 기도만 하던 중 며칠이 지나 “입원하고 오늘 퇴원해 연락을 드립니다. 나중에 몸이 회복되면 연락하겠습니다”라는 카톡 문자가 왔습니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제 나이가 들어가는 것보다 내 가족과 교우들이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세월의 엄위한 현실 앞에서 생각해 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의 가장 가치 있고 진실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 샬롬!